약가 전문가, 건보재정 외 약제비 '재원 다양화' 제언
국내사와 관련 정책 협의 필요성도
"제네릭은 자국산업…트레이드오프, 외자사에 국익 주는 꼴"
[데일리팜=이정환 기자] 약가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추가로 제네릭 약가를 섣불리 낮추는 행정을 멈출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3년만에 약가를 또 깎겠다는 정부 기조를 뒷받침할 타당성이나 명분이 충분하지 않고, 정책 반발 최소화를 위한 국내 제약계 의견수렴
노력도 없다시피 하다는 게 전문가들과 제약계 원로들의 시선이다.
건강보험재정 건전성 강화, 지속성 제고를 위해 제네릭 약값을 깎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막연하고 구태의연하다고 했다.
제네릭 가격만 놓고 건보 지속가능성을 논하는 자체가 난센스란 것이다.
무엇보다 제네릭을 중심으로 제약산업을 키워온 우리나라는 '제네릭=자국산업'이며, 제네릭 가치와 약가를 제대로 인정하는 게 곧 자국산업을
보호하고 국익에 부합하는 행정이란 제언도 나왔다. 결국 건보재정 바깥에서 재원을 추가로 다양화하는 노력 없이 기존대로 약가제도를 설계하면
제네릭은 반복되는 약가인하 쳇바퀴 속에 내던져질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5일 약가 전문가들은 정부의 추가 제네릭 약가인하 행정 앞에 초긴장 상태에 빠진 국내 제약사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했다.
약가인하, 건보 지속가능성 연계 불합리…'제네릭=자국산업' 인식도 부재
무엇보다 보건복지부가 제네릭 약가를 인하하려면 왜 깎아야 하는지, 약가인하로 만들어진 재원을 어디에, 어떻게 쓸 지를
국내 제약계 앞에 명료하게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형식적인 의견수렴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의견수렴 창구·방법을 마련해 '답정너' 식 약가인하가 아닌 제네릭 약가정책
전반에 걸친 쇄신과 혁신, 선진화를 모색하라고 했다.
다파글리플로진 성분 당뇨약 난립 사태 역시 약가인하 명분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시선이다. 제네릭 난립 문제 해소를
직격하려면 허가 제도를 손 봐야지 왜 애먼 약가를 때리느냐는 취지다.
정부가 매번 제네릭 약가인하 명분으로 내세우는 '해외 대비 비싼 국내 제네릭 가격' 역시 타당치 않다고 했다. 지금까지 국내 제약산업은
신약이 아닌 제네릭을 중심으로 커 왔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글로벌 제약 선진국과 제네릭 약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통계적으로나 산업 구조적으로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종혁 중앙대 약학대학 교수는 "일단 국내사 입장에서 3년만에 재차 제네릭 약가를 인하한다는 게 주기가 너무 짧다고 느낄 수 있다.
특히 정부는 제네릭 인하에 대해 국내 제약사들이 납득할만한 명분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면서 "왜 인하해야 하는지,
인하로 나오는 재원은 어떻게 쓸지 국내사가 납득하고 공감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무작정 인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종혁 교수는 "제네릭 난립은 품질과는 직접 연관이 있겠지만 건보재정과 직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수요가 한정된 시장에서
공급인 제네릭이 많아진다고 해서 건보재정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며 "외국보다 우리나라 제네릭이 비싸다는 명분 역시
국가마다 보건의료체계 자체가 다르고 제약산업 구조가 달라 단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신약을 다수 만들어 내는 제약 선진국이라면 당연히 제네릭 약가를 줄이고 신약을 많이 등재하는 게 국부와 국익, 자국 산업 발전에 부합한다.
우리나라는 제네릭을 중심으로 산업을 육성해왔는데 신약개발 기술력이 있는 국가와 제네릭 가격을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는 게
비상식적"이라며 "일본만 봐도 자국 의약품 가격은 충분히 높게 등재한다. 국가마다 상황이 다 다른데도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우리나라 정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재현 성균관대 약학대학 교수도 "이미 정부와 제약사가 갑과 을 관계가 돼버렸지만, 정부가 국내사와 제네릭만 홀대하며 일방적인 약가인하
정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건강보험은 계약이고, 정부와 국내사는 상호 계약 관계"라며 "정부는 제약사에게 일방적으로 약가인하 정책을
들이밀 게 아니라, 먼저 정책안을 내 달라고 제안하고 협의해야 한다. 약가인하가 꼭 필요하다면, 혁신신약 보장성 강화 때문에 재정이 부족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고 국내 제약사 목소리를 충분히 수렴해 반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재현 교수는 "예를 들어 정부가 보험자 입장에서 돈이 없으니까 약가를 인하해야 하는데, 제네릭은 어디까지 양해 할 수 있는지 국내사와
상호 협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보험자와 피보험자 간 충분한 대화로 약가인하 타당성을 함께 모색해야지 힘 없는 제약사에게 무조건
정부 정책을 따르라고 명령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암 기금 신설 등 건보재정 외 '약제비 재원 다양화' 모색 제언
특히 한정된 건보재정 파이 속에서 약제비 비중 23~24%를 유지하는 조건을 움직이지 않고 약가제도를 운영할 경우 결국 한계에
직면해 제네릭은 매년, 매 정권마다 약가인하 쳇바퀴를 돌 수 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왔다.
건보재정 내 약제비 비중을 늘릴 여력이 안 된다면, 의약품 보험적용과 약가 상한금액 산정을 위한 재원을 건보재정 외부에서
조달·창출하는 방안도 전향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취지다.
묶여있는 건보재정 한 주머니에서 약제 급여를 해주려면 희귀·난치질환을 타깃으로 한 글로벌 제약사들의 초고가 신약 급여에
밀려 제네릭이 설 자리가 비좁아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외자사 초고가 신약이 개발돼 국내 시장에 진입하면 할 수록 국내 제약사들에게 정부가 씌운 제네릭 약가인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환경이 점차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이종혁 교수는 "트레이드-오프는 '내 것과 내 것'을 맞바꾸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제네릭과 신약은 국내사와 외자사다.
즉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내 것과 남의 것이라 트레이드-오프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합한지 의문"이라며 "건보재정은 전체 파이가 한정된 제로섬이다.
제네릭을 깎아서 신약 등재에 필요한 재정으로 쓴다는 것은 곧 자국산업을 깎아 외국산업에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종혁 교수는 "건보재정 약제비 비중을 24%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기등재 제네릭을 깎는 정책이 불가피하다.
제네릭 약가인하가 건보재정 지속성 강화 정책으로 합리적인지 정부 고찰이 필요하다"며 "신약은 계속 들어올 거고 이번에 깎는다고
해결되지 않으므로 또 깎아야 한다. 결국 암 기금이라던지 건보재정 외부의 별도 재정 다양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별도 재정을 가져가면 약가제도 운영에 일부 막힌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약제비 재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면서
"지금 한국은 제네릭으로 돈을 벌어서 신약 R&D에 써야 하는 상황인데, 약가인하는 돈줄을 끊는 것이다. 난립하는 제네릭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제대로 된 약가로 R&D하는 제약사가 신약개발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산업 구조를 정부가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현 교수도 "암 기금 같은 건보재정 외 재원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도 복지부와 기획재정부가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정부가 닫혀있는 약제비 문제를 제네릭 약가인하 같은 국소적 행정이 아닌 큰 틀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재현 교수는 "정부가 제약사에 이어 국민도 납득하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감기 등 경증 약제비에 대해서는 환자 본인부담금을 올리고,
암 등 중증 약제비는 건보가 확실히 책임지는 등 정책다운 정책이 필요하다"면서 "보험이란 것은 큰 돈이 들어갈 때 쓰는 것이다. 국민에게 경증 본인부담금을 올려 중증에 쓰는 방식으로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설득을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내는 국민 입장에서도 정부가 감기로 아낀 돈으로 언젠가 내가 암에 걸리면 보장을 받을 수 있다면 수용할 것"이라며
"제네릭 약가인하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일방적인 정책이다. 약가인하만 갖고 문제를 풀려 해선 안 된다.
약제비를 건보재정 한 개 주머니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재원 다양화를 통해 약가정책을 모색해야 하는 게 오늘날 요구되는 현실"이라고 했다.
기재부·복지부, 암 기금 등 별도 재원 마련 '불수용'
약가 전문가들의 약제비 재원 다양화 필요성 제언에도 정부는 암 관리기금 등을 별도 신설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과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암 등 중증질환 신약 보험급여 확대를 위해 별도 기금을 신설하거나
건보재정이 아닌 국가 예산에서 지원하는 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지만, 정부는 수용불가 입장으로 맞서는 상황이다.
암 기금을 신설하는 암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수용곤란, 복지부는 신중검토 입장을 낸 바 있다.
기재부는 "국가재정법상 기금신설요건 결여로 암 기금 설치는 불가하다"며 "현재에도 국가암관리, 암환자 지원 사업 등으로
법안이 제시한 용도사업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새로운 특별회계 설치 시 효과도 불확실하고 특정 질환 기금을 신설하면
다른 질병과 형평성 문제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암 기금 신설은 국가재정법 상 재정당국 협의와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우리나라 건보 체계를 고려할 때 특정 질환에 대한 별도 기금 신설이 효율적인지 충분한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오늘날 복지부의 제네릭 약가인하 인식은 국내 제약사들의 폐업과 자국산업 경쟁력 약화를 촉진할 것이란 냉소 띤 반응을 보이는 전문가도 적지 않았다.
블록버스터급 국산 신약 2개, 글로벌 제약사 3개를 창출하겠다는 정부 청사진과 제네릭 약가인하 기조는 상충돼 모순이라는 비판이다.
필요할 때마다 급하게 약가인하 제도를 추가로 도입하는 약가정책에서 벗어나 큰 틀에서 제도를 새로 설계하는 정부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여재천 한국신약개발조합 상근이사는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출발이 제네릭이고 미국은 출발이 신약이다. 제네릭 약가인하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제약사들이 재투자 할 여력을 삭제한다"면서 "제네릭만 때리는 단편적 행정은 부조리하다. 약가인하는 상위 국내 제약사들의 고유한
기술력을 잃게 만들고 성장동력을 상실시키며 하위 제약사들은 문을 닫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여 이사는 "땜질식, 임시방편식 제네릭 약가제도를 멈추고 복지부가 약가정책 철학을 세우는데 더 공을 들여야 한다"면서
"제약계 의견을 정식으로 수렴하는 공청회 방식의 약가제도 수립 후 약가인하라는 행정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도출되고
난 뒤에야 약가인하 카드를 집어 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여 이사는 "대표적인 제약 선진국인 미국과 우리나라의 약가제도를 비교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필요없는 약가 사후관리 제도는
빨리 버리고 시장원리를 도입해 제네릭이 서로 경쟁하는 구조를 만드는 약가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면서 "선진국 약가 환경을 연구해서
국내 약가제도 새판을 제대로 짜는 노력이 보이지 않고 그저 약가만 깎는데 급급해 보여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정환 기자 (junghwanss@dailypharm.com)